본 글은 지금까지 작성했었던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필연적인 도래를 다시 한번 정리하는 개념의 글이다.
이 글의 주요 논지는 사회의 불합리성을 잠재의식이라는 내면의 상처와 축적과정으로 이해하고 현재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작성한 것이다.
"경쟁이 선" 이라는 인식의 축적
1) 우리 사회는 경쟁사회다.
우선은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회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경쟁을 염두에 둔 행동들이다.
경쟁이 없는 분야는 대부분 "진입장벽"이라 불리는 경제적 재화(능력 등)를 압도적으로 투입하여 감히 다른 행위자들이 진입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경쟁우위를 선점한 기업과 개인들이 차지한 분야뿐이다. 이를 제외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활동은 모두 경쟁이다.
2) 경제 활동에서 나외의 모든 이들은 경쟁상대.
회사를 다니며 경쟁하는건 타사와의 경쟁과 기존 조직원과의 경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서로 간의 경쟁을 부추기면서 동시에 서로 간의 화합을 강조하는 모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호 모순적 행위들인데, 회사에서 영업조직은 서로 간의 견제와 경쟁을 통해서 성장한다고 가르친다. 또 이러한 부분들이 조직의 성과와 성장에 기여하는 부분이 큰 것도 사실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한 회사에 영업조직이 3개가 있고 이들은 서로 실적으로 경쟁한다. 하지만 회사는 조직내 상호 경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각 팀이 담당하는 지역을 획일적으로 분할하여 각 지역의 영업담당자들의 활동영역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내부적 경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회사들이 담당하고 있는 고객사들의 영역은 이처럼 획일적이지 않다. 경기도에서 하는 공사를 충남에서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쟁에서 지역이 획일적으로 나뉜 상황이라면 이 실적은 과연 누구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아주 단순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소규모에 작은 공사라면 눈감고 갈 수 있겠지만 5~6년 동안 진행되는 도로공사라면 누구의 실적이 될 것인가?
회사라는 사회는 아주 작은 사회의 모든 부분을 보여준다. 사회의 작은 부분은 즉 사람이 관여하여 조정자 역할을 하도록 인위적 행동을 유발시킨다. 즉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더 친밀도가 높거나 덜 꼴배기 싫은 팀에 배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지극히 비경쟁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앉아서 그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억울할 것이고, 누군가는 누워서 떡을 먹는다.
3) 경쟁에서 뒤쳐지면

회사는 주단위, 월단위, 분기단위, 반기단위, 연단위 실적평가를 시행한다.
특히 영업조직의 경우엔 이러한 실적평가 시스템은 조직의 실적 압박을 크게 증대시키며, 영업조직에 동기부여를 한다. 말이 좋아서 동기 부여지, 이는 실질적 "실적압박"과 다름이 없다. 실적이 저조한 팀은 당연하게도 퇴출되거나 업무조정을 당한다. 혹은 인센티브에서 배제되어 의욕을 상실하게도 한다. 인센티브의 배제는 각 개인들이 받아들이기에 성과를 향한 무한한 동기부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테지만, 실제 동기부여보다 의욕상실을 발생시킨다. 쉽게 말해서 "더 열심히 해서 다음번엔 인센티브를 받겠어!!" 하는 마음보다는 "아 못해먹겠다. 더럽고 치사해서 못하겠다."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각 개인들이 처한 상황과 개인적인 상황인식이 마음속에 각인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누군가는 현실도피로 생각하며 "퇴사"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고, 누군가는 "설렁설렁" 일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극히 일부는 순수하게 다음엔 더 잘해서 나도 인센티브 받아야지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조직을 관리했던 입장에서 정말 그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 그런 사람들은 천천히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4)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

상상은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많은 상황극이다. 이러한 상황극은 사람들에게 희망, 좌절, 안도를 줄 수 있다. 다만 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은 이러한 상상마저 결여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의 말투는 지극히 "핑계, 변명"을 기본으로 한 말투를 구사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리고 회사라는 조직은 이를 극단적으로 확인한다. 바로 "실적"으로 말이다.
회사에서 실적이 좋은 사람, 팀은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사는 유지되어 간다. 반대로 그런 조직, 사람이 없는 회사는 서서히 망가져 간다. 이런 팀에 새로운 사람이 입사하여 새로이 일을 배우면 기존에 있던 실적 좋은 사람, 팀은 새로운 사람을 배척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미래의 경쟁상대"로 인식하는 팀이나,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갖는다. 그래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으며 그럴 의지도 마음도 없다. 다만, 그런 사람들은 "거짓"으로 보고하고, "기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조직을 키워가며 회사를 성장시킨다. 반대의 경우엔 새로운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금방 회사를 떠나게 한다.
같은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흔히들 회사에서 업무스트레스보다 사람스트레스가 더 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뛰어난 사람들은 자기 것을 내어주며 사람을 키워보려 노력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은 사회생활 좀 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의 근저엔 바로 "경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사회생활(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낙관할 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 말해서 매달 경쟁에서 승리하여 돈을 벌고, 생활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키우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까?
5) 우리가 만들어 놓은 "승자독식"의 세상
경쟁은 기본적으로 "승자독식"의 세상이다. "승자"는 개인일 수 있고, "조직"일 수 있다.
승자는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갖는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통해서 매일 경쟁하며 살아가는 게 "선"이라고 배우고 그렇게 해야만 사회가 발전하고 더 나아간다는 믿음으로 만들어 놓은 세상이란 말이다. 그리고 이를 대체할 수단이나,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우리가 살아온 세월 속에서 "자본주의"와 "경쟁사회"는 이미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기 때문이다.
도태되는 사람을 돌볼 여유는 개인과 일반적 기업들에겐 존재하지 않는 가치다. 과거 우리가 이룩한 물질적 풍요보다 한참 더 모자라던 시기의 "기부"와 최근의 "기부"가 다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21년에 비해서 소폭 상승한 2023년 기부참여율을 보더라도 일시적 상승일 뿐이다.
매우 낮아지고 있는 기부참여율은 사회가 얼마나 각박하고 어려워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아주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낸 이 경쟁의 세상 속에서 바로 옆사람을 밟고 올라야 더 "돋보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배워왔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우리 뇌 속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다.
6) 경쟁의 척도 "효율성"과 기성세대가 치부하는 젊은 사람들의 "각인된 불안"

월급을 400만 원 받는 사람이 25일 근무를 하고, 하루에 8시간 일을 한다고 보자.
이 사람은 시간당 2만 원의 일을 하고 있다. 이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이 여자는 아이를 낳았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급여를 받는 사람이다. 아이를 낳아서 행복하다.
하지만, 이 순간순간 이들은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여성은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소득활동에서 배제된다. 물론 좋은 공기업, 공무원, 노조가 확실한 대기업은 출산과 관련한 혜택들을 모두 누릴 것이다. 또한 소득활동에서 배제되더라도 복직이 쉽게 되어 다시 급여를 받으며 사회에 복귀하는 게 쉬울 수 있다. 흔히 육아휴직을 누리는 사람들은 정말 "손에 꼽힌다"라고 할 수준이다. 장담컨대 이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2600만 경제활동인구에서 매우 일부분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있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아이를 낳는 행위는 "효율적"인가? 자신의 경력과 사회적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활동기회의 단절을 감안할 정도로 높은 정신적 활동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말한다. 아주 예전에 봤었던 토론에서 가보지 않은 길을 자신은 걸어왔고 아이도 낳아서 잘 키우며 자신의 커리어도 잘 유지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패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토론하던 젊은 여성의 말을 하나하나 논리로 깨버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이 토론에서 중요한 건 패널을 상대로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던 그 성공한 정치인이자, 기자였던 사람의 논리가 아니다. 그 어린 여성이 갖고 있는 "불안"과 "경쟁 속 성장", "미래의 불확실성"이다. 이 젊은 여성이 갖고 있을 심리적, 정서적인 내면의 "공포"를 그 여성 패널은 무시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스토리만을 내세워 반대쪽의 의견을 묵살시킨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태도와 생각으로는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각인된 불안"이라는 원초적인 심리상태가 확대되어, 최근엔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업보와 같은 자조적 말까지 서슴지 않고 나오는 사회가 되었다. "가난은 비교"다. 비교되지 않는 가난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보다 더 과거에 8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가난"을 겪는 사람들이 없었을까? 그들은 왜 "가난"했지만 아이들을 낳았고, 양육했던 건가?
그 당시를 지금의 효율성으로 따지면 매우 비효율적인 행동들을 했던 우리들의 부모들은 왜 아이를 낳았는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젊은 이들은 모두 불행하다는 말인가? 비효율적 선택에 의해 태어난 "젊은이"들인가? 그래서 그 비효율적인 젊은 이들은 "가난하면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이 말이다.
단 한 줌의 행복도 누려본 적 없었더란 말인가? 단 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다. 경쟁만을 우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뒤처지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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